교호 대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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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호 대기근은 1732년 일본에서 발생한 대규모 기근으로, 1731년부터 이어진 잦은 악천후와 냉해, 해충 피해 등으로 인해 서일본 지역을 중심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쌀 수확량이 급감하고 쌀값이 폭등하여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교호 개혁의 실패에 영향을 미쳤다. 막부는 쌀 이외의 작물 재배를 장려하고 구휼 활동을 펼쳤으며, 고구마 재배가 널리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기근은 쌀 중심 경제 정책과 과도한 세금 정책의 문제점을 드러냈고, 사회적 취약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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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호 대기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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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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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발생 지역 | 이세국・오미국 이서의 서일본 각지 (특히 사이카이도의 피해가 심각) |
기간 | 1732년(교호 17년), 도쿠가와 요시무네 치세, 에도 시대 |
원인 | 蝗害 (운카의 해) |
총 사망자 수 | 1만 2,000명 |
추가 사망자 수 | 1만 2,000명 (기근민은 막부 직할령 내 67만 명, 여러 번은 197만 명. 폐사 가축은 14,000두) |
구호 활동 | |
구호 방법 | 천령의 조미를 공출, 간토 제국・시나노국・데와국・무쓰국에서 쌀을 구입하여 지원. (다이묘에게는 금은 대여・재부 제역 면제・참근 완화.) |
인구 통계 | 농촌부에서 백성 잇키(1732년에만 18건). 쌀값 폭등으로 도시부에서 打ちこわし. |
결과 | |
영향 | 쌀값 인상 정책을 전환하여 인하 정책을 실시. 구황 작물로서 고구마가 주목됨. |
2. 배경
1731년(교호 16년) 말부터 날씨가 좋지 않았고, 이듬해인 1732년(교호 17년) 여름에는 주고쿠, 시코쿠, 규슈 지방 등 서일본 지역, 특히 세토나이카이 연안 일대가 냉해와 해충으로 인해 흉작을 겪었다. 약 2개월 동안 이어진 장마는 냉해를 일으켰고, 흰등멸구 등 해충은 벼농사에 막대한 피해를 입혀 황해(蝗害)로 기록되었다.[2]
서일본 46개 번에 걸쳐 피해가 발생했으며, 이들 번의 총 수확량은 236만 석이었으나, 당해 수확은 27% 미만인 63만 석에 불과했다. 아사자는 12,000명(각 번이 막부에 적게 보고했다는 설이 있음)에 달했고,[8] 250만여 명이 고통받았다고 전해진다. 1733년(교호 18년) 정월에는 기근으로 쌀값이 폭등하자 에도 백성들이 부잣집을 습격하는 교호의 부치코와시(享保の打ちこわし)가 일어나기도 했다.
2. 1. 경제적 요인
교호 개혁으로 세금이 40%에서 50%로 인상되면서 농민들의 부담이 커졌고, 이는 농업 생산성 저하로 이어졌을 수 있다.[2] 1730년에는 한 영주와 부유한 상인들에게 쌀 구매 할당량을 의무적으로 도입하면서 쌀이 환금 작물화되었고, 이는 작물 다양성을 감소시켜 기근에 취약한 구조를 만들었다.[3]지쿠젠 국과 지쿠고 국(모두 현 후쿠오카현)에서 흉작이 계속되었고, 후쿠오카번 영내에서는 1720년 (교호 5년) 6월의 홍수, 1724년 (교호 9년) 8월의 풍수해, 1726년 (교호 11년)의 가뭄, 1729년 (교호 14년) 6월의 가뭄과 8월의 홍수로 2~3년마다 흉작이 이어졌다. 고쿠라번과 구루메번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구루메번 영에서는 1720년의 홍수로 산사태 7,737개소, 붕괴된 가옥 2,180호, 사망자 61명의 피해가 발생했다.[9] 토지 생산력에 비해 인구 증가가 한계에 도달[10]한 상황에서 잇따른 재해는 생산력을 더욱 저하시켰다.
2. 2. 자연적 요인
1731년(교호 16년) 말부터 날씨가 좋지 않았고, 새해에도 악천후가 계속되었다.[2] 1732년(교호 17년)에는 5월, 6월까지 비와 저온이 계속되는 등 악천후가 이어졌다.[8] 1765년(메이와 5년)에 성립된 후쿠오카의 지지 『세키조 시』는 1732년 2월부터 비가 계속되어, 보리가 절반 부패하여 익지 않은 채, 5월까지 비가 계속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11]장마가 약 2개월 동안 계속되면서 냉해를 초래했다.[13] 흰등멸구 등의 해충이 벼농사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고, 황해(蝗害)로 기록되었다.[2] 윤 5월에는 벼가 열리기 시작하여 농민들을 기쁘게 했지만, 6월 중순이 되자 해충이 『세키조 시』에 "논의 물에 떠서 강으로 흘러 나가니, 물의 색깔도 변할 정도"라고 기록될 정도로 대발생했다.[11] 이미 고래 기름을 사용하여 벼멸구를 구제하는 방법은 확립되어 있었지만 번식력이 높아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9][12]
1731년 겨울부터 1732년 여름에 걸쳐 역병이 유행하여,[11] 후쿠오카번 영내에서는 소와 말의 역병으로 약 4,000마리가 죽어 경작 능력 저하에 박차를 가했다.[12] 1732년 7월에는 가축 유행병이 발생하여 후쿠오카 번의 가축에 영향을 미쳤다.[4]
교호 연간은 지쿠젠 국과 지쿠고 국(모두 현 후쿠오카현)에서 흉작이 계속되어, 후쿠오카번 영내에서만 1720년 (교호 5년) 6월의 홍수와 1724년 (교호 9년) 8월의 풍수해, 1726년 (교호 11년)의 가뭄, 1729년 (교호 14년) 6월의 가뭄과 8월의 홍수로 2~3년마다 흉작이 이어졌다. 고쿠라번과 구루메번도 마찬가지였으며, 특히 구루메번 영에서는 1720년의 홍수로 산사태 7,737개소, 붕괴된 가옥 2,180호, 사망자 61명의 피해가 발생했다.[9]
3. 전개
1731년 12월부터 밀과 보리 등 겨울 곡물 작황이 나빠졌다. 수년간의 작황 부진으로 종자 비축량이 줄어 농민들은 다시 파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732년 5월부터 6월까지 주고쿠 지방, 시코쿠, 규슈 지방에 걸쳐 2개월 동안 춥고 습한 날씨가 이어지면서 곤충이 번식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었고 벼 묘가 썩어 들어갔다. 세토 내해 지역에서는 ウンカ일본어(일본에서 발견되는 곤충의 일종) 또는 메뚜기 떼가 나타나 서일본 전역의 논을 파괴하여 작물의 10%만이 피해를 면했다.[4] 1732년 일본의 총 쌀 수확량은 63만 곡으로, 평균의 27%에 불과했다.
쌀 가격은 폭등하여 기근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정상 가격의 5~7배에 달했다. 식량을 구입하기 위해 현금성 생산품에 의존하는 어촌은 큰 타격을 입어 인구의 3분의 1이 감소했다. 후쿠오카 번의 평균 사망률은 20%(32만 명 중 6만 6천 명)였고, 내륙 마을은 10% 미만의 사망률을 기록했다. 사망자의 대다수는 어린이였다. 규슈 남부도 영향을 받았지만, 사망률은 규슈 북부보다 낮았다. 이요-마쓰야마 번에서는 굶주림으로 인한 사망자가 최소 5,919명 기록되었으며, 주민들은 고사리와 칡 뿌리, 짚, 나무 가루를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5]
1733년 설날, 1,700명의 농민 폭도들은 식량을 비축한다는 소문에 격분하여 상인 高間伝兵衛일본어의 가구와 쌀 자루를 강에 던졌다. 이 사건은 일본에서 享保の打ちこわし일본어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 최초의 파업으로 기록되었다. 기근은 1733년 3월에 점차 종식되었다.
3. 1. 피해 지역 및 규모
1732년(교호 17년) 여름, 주고쿠, 시코쿠, 규슈 지방 등 서일본 지역, 특히 세토나이카이 연안 일대에 냉해와 해충으로 인해 흉작이 발생했다. 약 2개월 동안 지속된 장마로 냉해가 발생했고, 흰등멸구 등의 해충이 벼농사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피해는 서일본의 46개 번에 이르렀다. 이들 번의 총 수확량은 236만 석이었으나, 당해 수확은 27% 미만인 63만 석에 불과했다. 공식 기록된 아사자는 12,000명이었으나,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8] 막부 직할령에서는 67만 명, 여러 번에서는 197만 명 등 총 250만 명 이상이 기아에 시달렸다.[8]
후쿠오카번에서는 1720년(교호 5년)부터 잦은 자연재해로 흉작이 계속되었고, 1731년(교호 16년) 말부터 날씨가 나빠 1732년에는 보리 흉작과 소, 말 역병까지 겹쳐 경작 능력이 크게 떨어졌다. 해충과 냉해로 인해 주고쿠, 시코쿠, 규슈 지방의 서일본 각지가 흉작을 겪었고, 특히 사이카이도(규슈 지방)의 피해가 심각했으며,[8] 세토 내해 연안 일대도 또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13]
고쿠라번에서는 7월 하순에 해충으로 대부분의 벼가 썩어 아사자가 영민의 약 4분의 1인 41,195명에 달했다.[10] 구루메번에서도 6월에 벼멸구가 대발생하여 큰 피해를 입었고, 이듬해 가을까지 11,198명이 아사했다.[18]
다음은 주요 지역별 피해 상황을 정리한 표이다.
지역 | 주요 피해 내용 | 아사자 수 (추정) |
---|---|---|
주고쿠, 시코쿠, 규슈 지방 (46개 번) | 총 수확량 236만 석에서 63만 석으로 감소 (73% 감소) | 12,000명 이상 (공식 기록) |
후쿠오카번 | 잦은 자연재해, 보리 흉작, 소/말 역병, 해충, 냉해 | 7만 ~ 10만 명[9][15][16] |
고쿠라번 | 해충으로 벼 대부분 썩음 | 41,195명[10] |
구루메번 | 벼멸구 대발생, 강제 연공 징수 | 11,198명[18] |
3. 2. 지역별 상황
西日本일본어 여러 번 중 46개 번에 걸쳐 피해를 입었다. 46개 번의 총 수확량은 236만 석이었지만, 이 해의 수확은 불과 27% 미만인 63만 석 정도였다. 아사자는 12,000명에 달했다.[8] 또한 250만여 명의 사람들이 고통받았다고 전한다.- '''후쿠오카번''': 규정대로 연공을 수납할 수 있었던 마을은 773개 중 26개에 불과했다.[9] 아사와 도망으로 인해 촌민의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든 곳도 있었다.[17]
- '''고쿠라번''': 해충으로 대부분의 벼가 썩어 버려, 아사자는 영민의 약 4분의 1인 41,195명에 달했다.[10]
- '''구루메번''': 벼멸구가 대발생하여 예년의 2-3할에 해당하는 수확밖에 거두지 못했고, 아사자가 급증했다.[18][19]
- '''오미시마(大三島)''': 시모미 요시주로(下見吉十郎)가 가져온 고구마 덕분에 아사자가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남은 쌀을 마쓰야마 번에 헌상할 여유가 있었다.
4. 대책 및 영향
1731년 말부터 날씨가 좋지 않았고, 새해에도 악천후가 계속되었다. 1732년 여름, 냉해와 흰등멸구 등의 해충으로 인해 주고쿠 지방, 시코쿠, 규슈 지방 등 서일본 지역, 특히 세토나이카이 연안 일대가 큰 흉작을 겪었다. 약 2개월 동안 장마가 계속되면서 벼농사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이는 황해(蝗害)로 기록되었다.[4]
서일본의 46개 번에 걸쳐 피해가 발생했으며, 이들 번의 총 수확량은 236만 석이었으나, 당해 수확은 27% 미만인 63만 석에 불과했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아사자는 12,000명이었으나,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徳川実紀일본어에는 아사자가 969,900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250만여 명의 사람들이 기근으로 고통받았다고 전해진다.[5]
1733년 정월에는 기근으로 인한 쌀값 폭등에 분노한 에도의 백성들이 부잣집을 습격하는 교호의 우치코와시가 발생하기도 했다.
기근은 1733년 3월에 점차 종식되었다. 사쓰마 번에서 밀반입된 고구마는 세토 내해 지역에서 기근을 막는 데 기여했으며, 이후 고구마는 일본 전역에서 널리 재배되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1735년 작물 다양화를 위한 개혁을 시행하여 농민들이 추가 세금을 납부하는 대가로 환금 작물을 재배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6]
스미다가와 불꽃 축제가 ''교호 대기근''에 대응하여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설이 있지만, 이는 속설이며 실제로는 무관하다.[7]
''교호 대기근''은 교호 개혁에 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8]
4. 1. 경제 대책
1733년(교호 18년) 정월, 기근으로 인한 쌀값 폭등에 곤궁해진 에도 시민에 의해 교호의 우치코와시가 일어났다[8]. 여기에는 곤궁한 백성 2, 3천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사건이었다[8]. 에도 막부 제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혼뵉코 보호를 위해 지금까지 쌀값 인상 정책을 지속하며 쌀 시장에도 개입했으나, 쌀값 폭등으로 식량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기존 방침을 바꿔 비상 수단으로 쌀값 인하 정책으로 전환했다[8]. 막부는 다이묘에게 금은 대여, 재정 지원, 산킨코타이 완화 등의 조치를 취해 피해 완화에 힘썼고, 민간에 대해서는 쌀 매점 금지, 위미의 강제적인 방출, 주조 제한 등을 실시했다[8].후쿠오카 번에서는 1728년(교호 13년)에 근휴법을 정해 봉록 삭감을 실시했으나, 1732년 교호 대기근으로 연공 증징에 의한 재원 확보가 불가능해져 구라야시키의 구라모토를 고노이케 가문에 거절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번주 구로다 쓰구타카는 1733년(교호 18년)에 요시다 에이넨을 군방에 임명하여 기근 후 재정을 재건하도록 했다. 요시다는 1734년(교호 19년)에 용심제를 만들고, 사찰과 마을, 군, 읍마다 비축미를 확보했으며[18], 황폐해진 농촌 부흥을 위해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 1734년 (교호 19년) 1월: 춘면극 도입.
- 1735년 (교호 20년) 2월: 연공률을 인하하여 증작분의 연공을 면제하는 감세책 채택.
- 1735년 (교호 20년) 12월: 농업에 종사하는 봉공인의 급료를 정하고 영외 봉공 금지.
- 1736년 (겐분 원년) 2월: 황폐해진 논밭의 입식 희망자에게 가작료를 지원하는 등의 우대책 채택[18].
이 외에도 옻나무 재배, 석탄 채굴 장려, 옻나무, 닭알, 꿀의 전매제, 산자 양육 제도 정비 등의 대책을 추진했다[15][21]. 이러한 재건책으로 1740년 (겐분 5년)에는 기근으로 비롯된 경제 위기를 벗어났고, 전년 1739년 (겐분 4년)에는 구라모토에 고노이케 젠에몬이 취임하여 오사카 상인과의 관계가 정상화됨과 동시에 에도와 국원에 대한 송금과 온가 강 유역의 연공미 운송을 고노이케 가문에 일임했다[21].
구루메 번에서는 일본 술 양조를 금지했고, 막부로부터 차입금으로 재정 위기를 넘겼다.
4. 2. 구휼 및 위령 활동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부유한 상가와 사찰에 기아민 구제를 촉구하고, 메뚜기(蝗蟲) 예방약 판매 추진과 해충 피해 제거를 위한 기원도 행하게 했다[8]。후쿠오카 번 후쿠오카 성 아래에서는 1732년 7월 4일에 스후쿠지와 도초지에서 죽은 자의 추복과 오곡 풍년을 기원하는 기도가 행해졌으며, 하카타의 상인이 의연금을 모금하여 니시마치하마(현 후쿠오카시하카타구가미야마치)의 아라키야에서 죽을 쑤어 나누어 주었다[11]。12월에는 막부의 쌀도 도착하여, 우오마치하마에서도 죽을 쑤어 나누어 주었다[9]。후쿠오카 성 아래에는 아사자를 추도하는 기아지장(飢人地藏)이 후쿠오카시 주오구미나미 공원[16]이나 하카타구 나카스[24]등에 남아 있으며, 죽을 쑤어 주는 것을 구하며 해안가로 향했던 농민이 불렀다는 민요가 근대까지 남아 있었다[11][15]。고쿠라 번에서는 영민에게 쌀과 대두를 배급하고, 고쿠라 성 아래의 나카쓰구치문에서 죽을 쑤어 나누어 주었다. 번의 명령으로 카이젠지의 주지인 다이츄 선사가 영내를 돌며 공양을 행하는 동시에, 아사자를 기록하여 과거장을 작성했다[10]。
후쿠오카번 영토였던 하카타 만 일대에는 교호 대기근에 유래하는 지장상이나 일자일석경 등의 공양탑이 약 40기 현존하며, 오늘도 위령이 계속되고 있는 곳이 있다[15][16]。1738년(겐분 3년) 명의 일자일석경 공양탑(카스야마치 토하라)은 토하라 마을 촌장의 발원으로 건립된 공양탑으로, 7만 개의 경석과 더불어 과거장으로 기록이 남아 있어 카스야마치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15][25]。
에도에서도 피해가 있었으며, 이 기근의 사망자 공양을 위해 스미다가와 불꽃 축제가 시작되었다는 설이 널리 유포되고 있지만, 이것은 속설이며 교호 대기근과 스미다가와 불꽃 축제는 무관하다[26]。
4. 3. 농업 정책 변화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쌀 이외의 곡물 재배를 장려했고, 아오키 곤요 등은 고이시카와 약원이나 후키아게 어원에서 고구마 재배를 시험했다.[14][27] 이후 고구마 재배는 동일본 각지로 널리 보급되었다.1735년 막부는 작물 다양화를 위한 개혁을 시행하여 농민들이 추가 세금을 납부하는 대가로 환금 작물 또는 기술 작물(유료 또는 섬유 식물)을 재배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5. 평가 및 의의
徳川実紀일본어에 기록된 969,900명의 사망자 수는 과장된 것으로 보이며, 다른 출처에 의해 확인되지 않았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사망자 수는 12,172명이었지만, 실제 사망자 수는 169,000명에 달했을 수도 있다. 교호 대기근은 교호 개혁에 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7]
1711년 下見吉十郎일본어가 사쓰마 번에서 밀반입한 고구마는 세토 내해 지역의 大三島일본어에서 기근을 막는 데 기여한 것으로 기록되었으며, 이후 고구마는 일본 전역에서 널리 재배되었다. 막부는 1735년 작물 다양화를 위한 개혁을 시행했다. 농민들은 추가 세금을 납부하는 대가로 환금 작물 또는 기술 작물(유료 또는 섬유 식물)을 재배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스미다가와 불꽃 축제는 교호 대기근에 대응하여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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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式記録では1.2万人の餓死者だが、実際は数十万人の恐れ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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享保の大飢饉 江戸時代中期に起こった飢饉で、江戸四大飢饉(寛永・享保・天明・天保)の一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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享保の飢饉と横手【横手校区】横手享保飢饉地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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当サイトは過去に四国各地で発生した災害に関する情報を収集、整理したものです。 享保17年の洪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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享保の大飢饉-飢えと病気で死者続出
福岡市市長室広報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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享保一八年隅田川川開開始説の形成過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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